안남미(安南米), 배고픈 기억과 배부르지 않는 밥
김주명
2015년경, 지인들과 함께 자바를 여행할 때였다. 인도네시아의 대중교통으로만 자바 섬을 여행하기로 계획하고 우선 기차에 올랐다. 자카르타의 감비르 역을 출발한 기차는 이내 도심을 벗어난다. 그러자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는 논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도 계속해서 논이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목적지는 중부자바의 문화유적 도시 족자카르타, 그렇게 서너 시간을 달린 기차가 이제 완만한 오르막을 따라 산을 넘기 시작한다. 신기로움의 탄성은 이제 지쳤건만, 산에도 논이 이어져 있다. 계단식으로 쌓여있는 논은 정점을 넘기니 이제 내리막, 논들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8시간 정도의 기찻길 내내 펼쳐진 논, 저곳에서 자라는 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안남미’이다.
안남미의 ‘안남’은 베트남에서 온 쌀이다. 지금은 중국 남부지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생산하는 쌀을 안남미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불면 날아가는, 밥맛이 부석부석한’ 끈기가 없는 쌀의 대명사로 불린다. 실제 필자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밥맛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딱히 안남미로 지은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는데, 어째서 안남미는 그렇게까지 유명할까? 혹시 베트남 전쟁과도 관련이 있나?
사실, 한국에서의 안남미는 70년대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통일벼에 가깝다. 종자 개량을 통해 생산량을 늘리고 식량자급의 꿈을 이뤄내는 막중한 역할을 맡은 품종이기도 하다. 생산된 통일벼는 정부가 전량 수매를 하고, 다시 쌀로 방출되면 이를 ‘정부미’라 불렀고 맛없는 쌀의 지위를 차지했다. 어린 시절, 필자의 고향 청도에서도 통일벼를 재배했다. 하지만 논을 나누어 집에서 먹을 벼는 따로 재배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일반 미곡상들이 수매를 하니 ‘일반미’로 불렀던 기억도 있다.
그러면 한반도에 안남미가 처음으로 온 것은 언제쯤일까?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00년대 초, 베트남에서 쌀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는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 후, 막대한 양의 쌀을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산미증산’이란 구호 아래 한반도의 쌀을 빼앗아 갔으며, 그 빈자리에 베트남에서 수입한 쌀, 안남미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도 조선의 궁핍이 해결되자 않자, 만주에서도 쌀을 들여오고, 쌀과 조를 섞고, 심지어 쌀에다 모래도 섞는 등 민족사의 궁핍함과 고단함, 억울함을 안남미에다 죄다 풀지 않았나 싶다.
분식을 장려하며 식량의 자급자족을 중요시했던 시절, 지금은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먹거리들이 넘쳐난다. 농업생산 대국인 인도네시아는 아직 쌀을 수입하는 처지이다. 물론 3억에 가까운 인구와 밥을 많이 먹는 식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의 영향으로 다시 식량자급의 중요성이 부상하고 있다.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바이러스 전파에도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버린 지금의 상황에서 식량과 자원 등 삶의 기본적인 재화는 바로 생명으로 직결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보르네오 섬 남부지역에 논을 개간하기로 한다고 한다. 그런데 1차적으로 개간하는 면적이 서울시의 3배 면적이라니? 게다가 3모작이 가능한 지역을 우선 논으로 개간한다니, 그 생산량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지금 지구촌의 인구를 70억으로 추산하고 있다. 100년 전만 해도 상상 못 할 일이다. 과연 지구는 어느 정도의 인구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모든 재화는 영원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는 걸, 인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안남미의 밥심으로 충분히 버틸 수는 있을까? 이 문제가 정말 내가 고민해야 될 문제인지, 지평선에 닿은 논처럼 나의 작은 우주를 꽉 채우고 있다.
from 롬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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