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협-에세이 산책
비 그리고 커피 향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오후 두 시, 발리 우붓(Ubud)으로 가는 길에 잠시 관광객들과 어울려 기념품 가게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후드득 자띠(티크)나무, 큰 잎들을 후려치고 지나가는 굵은 빗방울 소리에 놀라 길 건너 커피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바람을 타고 보이지 않게 다가온 진한 커피 향에 내 후각세포들은 순식간에 무장해제 당한다. 커피 향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이런 순간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특히 이렇게 비가 오고 젖은 날 커피 향은 사람을 유혹하는 마력(魔力)이 배가 되어서 사람의 깊은 후각세포들 사이로 파고드는 것 같다. 팔백여 종류나 된다는 그 많은 커피 향들 중에는 오늘같이 이렇게 비 오는 날 습기와 만나 갑자기 짙어지는 특별한 향이 있거나, 아니면 우리 몸 속 후각세포가 비만 오면 커피 향에 유독 반응을 하는 세포가 있는지 참 궁금하다. 어쨌든 나는 비 오는 날 짙은 커피 향을 두고 떠나지 못하는 마음 약한 사람이다. 잠시 진한 커피 향에 빼앗겨 버렸던 내 정신을 다시 찾은 후 젖은 옷의 물기를 툭툭 털어내며 창가로 가서 자리 잡았다.
내가 인도네시아 시골 커피 집이나 식당에 가면 언제나 찾게 되는 투명한 유리잔 커피가 이집에도 있다니 큰 선물이나 받은 듯 행복해 진다. 반가운 마음으로 유리잔 커피를 주문해 놓고 고개를 창으로 돌린다. 소나기 본대들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려는 듯 사나운 약탈 파괴의 광란을 펼치고 있다. 커피 집 창틀 위에 매달려 바르르 떨고 있는 함석 차양이 이제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길 건너편 가게 처마 앞에는 무서운 소나기 물 폭탄을 맞은 서양인들도 파랗게 질린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다. 몽골 침략군들의 무자비한 약탈이 지나가고 난 뒤 키예프 공화국의 거리 모습이 저랬을까? 길가 여기저기 장승같이 크기만 한 자띠(티크) 나무 가지들도 힘 한번 못쓰고 땅 바닥에 떨어져 너부러져있다. 긴 바틱(Batik) 사롱 치마로 온 몸을 둘러 맵시를 낸 여 종업원이 맥주 잔 같이 생긴 유리 잔 부북 커피 (Bubuk Coffee)를 내려놓는다. 포도주 애호가들이 포도주는 문화라고 하듯이 내게는 커피도 문화다. 유리 커피 잔을 들어 코에 대고 냄새를 모아 코 안 쪽 후각 담당 세포로 보내 보고, 첫 한 모금 커피도 입안에 머금은 후 그 향기를 코 뒤 쪽 후각 담당 세포로 보내며 눈을 감아보는 순간 짙은 커피 향에 나는 빠져든다.
창가 한국 여인들의 눈들도, 왼편 테이블 일본인들의 눈들도 내 유리잔 커피로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주문한 유리잔 커피를 평생 처음 보는 듯 무척 신기해 보이는 모양들이었다, 아니면 커피 향에 빠져들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유리잔 커피는 오감(五感) 모두를 즐기게 해 준다. 세라믹 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각과 촉각의 즐거움을 이 유리잔 커피가 주기 때문이다. 투명한 유리잔 측면에서 보는 갈색 커피 액의 변화 모습을 보는 시각의 즐거움이 그 중 하나이고, 긴 유리잔 몸통으로부터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을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촉감의 즐거움이 그 중 또 하나다. 촉각의 즐거움은 세라믹 잔에서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촉각의 즐거움은 유리잔처럼 몸통이 길어야 손바닥 전체로 잔의 따뜻함을 즐길 수 있는데 세라믹 잔은 손바닥에 닿는 면적이 작아서 손바닥 전체로 따뜻함을 즐기기에는 좀 모자란다. 이렇게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五感)을 즐길 수 있는 유리잔 커피는 더욱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가 이 땅에 오기 전 커피는 다방 커피나 계란 동동 띄운 한약 쌍화차가 전부였다. 그러던 내가 인도네시아에 와서 다양한 커피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이 유리잔 커피였다.
자카르타 같은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변두리나 시골거리 커피 집이나 식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유리잔 커피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호기심 삼아 처음 주문해 본 유리잔 커피는 종이 필터도 없이 맥주잔에 커피 가루를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붓고 휘휘 저어 가져왔다. 마시기가 매우 거북한 유리잔 커피 부북이었다. 그랬던 나도 어느 날부터 그런 유리잔 커피를 즐기게 되었다. 그 시작은 중부 자와 스마랑(Semarang)에서 보로부두르
(Borobudur)로 가는 시골 길가에 있는 갤러리에서 화가 W선생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그림을 전시하고 팔기도 하는 갤러리 주인이자 화가인 W선생은 갤러리 마당 공간에 벽은 없고 지붕
만 있는 카페를 만들어 놓고 유리잔 커피를 팔기도 하는 시골 사람이었다. 카페 주변에는 열대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고, 구석자리에 아름드리 원목 절반을 잘라 매끄럽게 다듬어놓은 긴 통나무 의자의 말없는 유혹에 슬며시 가서 앉아 본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 소나기가 내리는데 W선생과 나는 이 노천 사랑방 같은 곳에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소나기 내리는 날 짙은 커피 향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신이 내려준 약이라고 했다. 자신이 시 시골 길가에 갤러리를 만들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커피를 좋아해서였고, 다른 이유는 그림을 그리기 좋은 시골이라서 라고 했다.
나의 유리잔 커피 향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번 발리 우붓 가는 길에 갑자기 들어온 이 집은 커피 마시러 온 것 보다는 순전히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들어 온 집이었지만 다행히도 내가 찾는 유리잔 커피가 있는 집이었다. 뿐만 아니라 커피를 볶아 내는 로스팅도 하는 집이라고 했다. 커피 로스팅하는 현장을 한 번 보고 싶다고 여 종업원에게 부탁했더니 잠시 후 파르바티라는 30대 여인이 와서 뒤뜰로 안내했다. 함석지붕만 있고 벽이 없는 그곳에서 커피콩 씻고 볶는 로스팅 전 과정을 하고 있었다. 현대식 로스팅 기계는 없고 벽돌을 길게 옆으로 쌓아 만든 여러 개의 불 아궁이, 그리고 그 위에 전통 재래식 로스팅 가마솥들이 걸려 있었다.
가마솥에는 씻은 커피콩들이 볶아지고 있고, 남자들이 주걱으로 커피들이 열을 고루고루 받게 하려는 듯 저어주고 있었다. 커피콩들이 열을 받고 터지며 내는 타닥타닥 소리는 수분과 가스를 토해 내는 소리라 했다. 커피콩들이 가마솥 안에서 볶이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초록색 콩이 노란색, 계피차처럼 붉은 갈색으로, 보통 갈색으로,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짙은 갈색 커피 원두는 콩 속 당분이 태워져 짙은 갈색으로 변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커피콩 속의 당이 타서 만들어진 갈색 당분, 즉 태워진 설탕에 다른 설탕이나 초콜릿이 만나면 단 맛이 배가 된다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독특한 커피 향은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좋아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향임에 틀림없다. 뒤뜰 로스팅 장소를 떠나 커피 집 자리로 돌아오니 창밖의 소나기들은 어수선한 약탈의 현장만 남겨놓고 우붓 언덕 위로 넘어가고 있었다.
소나기 소리가 많이 줄어들었고 창틀 위 차양도 이제 조용히 안도의 한 숨을 쉬고 있다.
비 오는 날 짙은 커피와 짙은 향은 인드라의 재충전 에너지 소마(Soma)가 되어 가뭄에 마르고 갈라져 있던 내 마음 호수바닥을 에너지로 채워 주었다. 아수라들과 싸움에 밀려 지쳐있던 인드라(Indra)가 소마(Soma)를 마시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아수라(Asura)들을 물리치듯이 나도 오늘 창밖의 비, 짙은 소마 커피 향을 마시고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아수라들을 물리칠 힘을 얻는 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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