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회한인니문화연구원 59회 열린강좌 강의주요내용
‘공정무역 운동과 물따뚤리의 만남’
한인니문화연구원(원장 사공경)은 지난 2월 23일 9시30분부터 제 59회 열린강좌를 진행했다. 이번 강좌의 강사인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엄은희 박사는 ‘공정무역 운동과 물따뚤리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제공했다. 엄은희 박사는 지난 해 한국에서 『흑설탕이 아니라 마스코바도: 필리핀의 빈농의 설탕이 공정무역상품이 되기까지』(도서출판 따비)를 출판했다. 책의 주요 내용은 필리핀판 설탕의 역사 그리고 한국-필리핀 간의 공정무역을 통한 시민협력을 다룬다. 강의에서는 세계, 아시아, 한국의 공정무역 운동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먼저 제공한 후, 세계 최초로 시장에서 성공한 공정무역 커피브랜드인 ‘막스하벨라르(Max Havelaar)’의 탄생 배경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세계 공정무역 운동과 인도네시아가 어떻게 맞닿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강의의 주요 내용을 지면으로 옮겨본다.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엄은희 박사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소비자생활협동조합(생협), 공유경제, 공정무역, 공정여행, CSR과 CSV이 공유하는 특징이 무엇인지 질문하였다. 답은 “경제와 사회적 가치의 결합”이다. 과거엔 정치와 경제, 경제와 사회가 상호 분리된 영역과 기능이 있다고 여겨졌지만 최근엔 경제-정치-사회의 중첩영역이 커지고 있으며 이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특히 2007/8년 전세계적으로 이른바 ‘삼중위기’(금융위기, 기후위기, 석유위기)를 경험한 뒤 이윤추구에 매몰된 경제운용을 벗어나 사회적 책임과 보편적 가치를 위한 경제의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예컨대 오늘날의 기업은 생산활동을 통해 고용과 이윤을 창출하는 전통적 역할을 넘어 사회적책임을 다하고 더 나아가 지역사회와 더불어 공유가치를 창출하라는 이른바 ‘기업시민’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안에서 발달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등은 모두 “시장의 방식을 활용하되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중의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경제조직들이다.
사회적 경제영역에서도 공정무역은 매우 특징적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경제 영역은 대체로 경제의 지역화를 지향한다. 일정 지역 내에서만 통용되는 지불수단으로서의 지역화폐 혹은 내 고장에서 생산한 것을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로컬푸드 혹은 지산지소(地産地消)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와 비교할 때 공정무역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제 1세계의 윤리적 소비자와 제 3세계의 농민과 생산자들이 연결되는 국제적인 운동이다. 공정무역은 다음의 5대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대안무역이다.
첫째, 취약한 생산자들을 위한 시장접근성의 원칙이다. 생산자들이 조합을 만들 때 되도록 싱글여성이나 노약자 등 기존의 시장관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한다. 또한 생산자에서 최종소비자까지 연결되는 유통 사슬을 짧게 함으로써 최종상품 가격에서 생산자들의 지분을 늘려주는 것도 이 원칙에 해당한다. 둘째,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무역 관계이다. 공정무역은 자선에 기반한 원조의 대안으로 시작되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당장의 먹거리를 주는 것을 넘어 그들이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을 구매해 줌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수평적 관계를 중시한다. 더불어 일회성 구매가 아니라 장기 지속적인 거래 관계를 약속함으로써 생산자들이 미래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셋째, 역량강화의 원칙. 생산자들에게는 정기적으로 거래를 위한 간단한 회계와 구매자와의 커뮤니케이션 구축 나아가 유기농 전환을 위한 교육과 훈련이 제공된다. 넷째, 소비자인식증진을 위한 캠페인. 인식 전환은 생산자 뿐 아니라 소비자들 측면에서도 요구된다. 소비자들도 자선의 마음보다는 동등한 관계에서 얼굴 있는 거래를 위한 자발적 선택으로 공정무역을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계약으로서의 공정무역 원칙이다. 공정무역 상품의 적정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공정무역 상품들에는 소시얼 프리미엄(social premium)이 덧붙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공정무역 상품은 관행 상품에 비해 약간 비싸게 팔리는 경우가 있다. 이 돈은 생산자 개인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 조직의 공동의 자금으로 적립되어 조합원들의 역량강화, 마이크로 파이낸싱, 장학금, 탁아시설 운영 등에 주로 소요된다.
세계공정무역의 현황은 2016년 기준 약 78억 8천만 유로(한화 11조원 규모)에 달하며, 생산자 조직에 지급된 공정무역 프리미엄은 1억 5천만 유로(한화로 1,940억원) 정도이다. 규모의 측면에서는 관행무역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공정무역으로 혜택을 받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수는 160만 명에 달한다. 주로 거래되는 상품은 바나나, 코코아, 커피, 차, 설탕 등의 먹거리가 다수를 이루지만 꽃, 꿀, 금, 스포츠용품 등까지 상품군이 확대되고 있으며, 최근 유럽에서는 락탄이나 대나무로 만든 관이나 탄소크리딧(carbon credit)등의 상품도 공정무역 방식으로 거래되곤 한다.
그렇다면 강연의 제목이기도 한 공정무역과 물따뚤리는 어떻게 연결될까?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먼저 세 개의 서로다른 이름의 관련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이름은, 에두아르 도우스 데케르(Eduard Douwes Dekker)로,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이자 180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 반뜬주 르박에서 근무한 식민지 관료이다. 두 번째 이름은, 물따뚤리(Multatuli)이다. 언뜻 인도네시아어처럼 들리기도하지만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뜻의 라틴어인데, 이 이름은 데케르가 작가명이다. 세 번째 이름은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이다. 이 이름은 데케르가 물따둘리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의 주인공으로, 네덜란드의 강압적 식민정책(작물할당제)과 현지 지배세력들의 가혹한 민중착취에 반기를 들고 인도네시아 민중들의 편에 섰던 인물이다. 정리하면, 세 개의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알고 보면 소설 속 주인공인 막스하벨라르와 소설의 저자인 물따뚤리 그리고 작가의 본명이자 식민관료였던 데케르는 “같은 사람의 여러 자아들”인 셈이다. 소설『막스 하벨라르』는 식민지에서보다는 제국주의의 본국인 네덜란드와 유럽 시민들에게 더 큰 반향을 가져왔다. 이 소설을 계기로 식민 통치의 폭력성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 식민통치의 문화적 전환과 식민지에서의 민족주의 발흥의 불씨가 된 책으로 유명하다.
이 세 개의 이름 중 ‘막스 하벨라르’는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유럽에서는 공정무역 커피의 브랜드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의 무대는 멕시코 치아파스 주이다. 1980년대 멕시코의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신부 프란스 판 데어 호프는 농민들이 생산한 상품이 헐값에 팔리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네덜란드의 시민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에서는 <막스하벨라르 재단>이, 멕시코에서는 <막스하벨라드 협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멕시코의 농민들이 생산한 커피가 막스하벨라르라는 라벨을 달고 유럽 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막스하벨라르 커피는 세계 최초로 성공한 공정무역 브랜드로, 이 성공을 계기로 공정무역 시장의 파이가 커지고 공정무역의 주된 상품도 수공예품에서 농산물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공정무역도 라벨을 달고 주류시장에 진출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멕시코산 공정무역 커피 브랜드의 이름이 인도네시아 르박군을 배경으로 ‘아시아의 로빈후드’로 불렸던 소설 주인공의 이름을 달고 세계로 펼쳐나간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 인도네시아-유럽사회-중남미의 멕시코 간의 연결 고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인도네시아에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 APIKRI나 MITRA Bali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정무역 생산자 조직들이 활발히 활동 중에 있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상품에는 식기류와 홈웨어에서부터 바틱 옷, 수마트라와 칼리만탄의 커피까지 다양한 상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공정무역은 요사이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 중이다. 예전엔 생산지는 제 3세계 소비지는 제 1세계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아시아 신흥국들 중에서는 생산국이자 소비국이 겹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아시아의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좋은 상품, 유기농 상품, 얼굴있는 거래를 바라는 소비자층도 함께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에서는 공정무역과 로컬푸드의 결합, 공정무역과 사회적경제의 결합,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의 결합 등 다양한 변화들이 시도되고 있는 중이다. 인도네시아 코트라의 주관단체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한국투자기업들의 CSR과 OVOP(One Village One Product) 프로그램이 있다. CSR 중 지역사회를 위한 공헌을 원하는 기업과 농촌마을의 특산품의 가치사슬 진입 및 상품질 향상을 연결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도 잘 운영된다면 장기적으로 공정무역이나 인도네시아 국내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여러 질문과 답이 이어졌는데, 마지막으로 ‘경제’와 ‘사회적 가치’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요사이 한국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서도 공정무역이 세계를 만나는 다른 방식의 사례로 소개된다고 한다. 경제적 이윤과 사회적 가치의 동시 추구 그리고 다른 세계와의 윤리적 접속.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욕심 많은 구호일 수도 있지만 이런 활동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공정함과 형평성도 함께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단, 좋은 일이니까 무조건 사달라는 방식이 아니라 공정무역 생산자와 소비자단체들도 ‘상품이 좋아서 자세히 보니 공정무역이기까지 하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시장에서의 경쟁력과 실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강사의 답으로 전체 강연이 매듭지어졌다.
강연을 제공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의 엄은희 박사는 서울대학교 지리교육학 박사이자 동남아 지역전문가이다. 소속기관인 사회과학연구원은 한인니문화연구원과 MOU 체결 기관이며, 소속연구원들은 한인니문화연구원의 객원연구원이기도 하다. 엄은희 박사는 코린도 파푸아 사업장의 사례가 포함된 『말레이세계로 간 한국기업들』 (2014, 눌민)의 공저자이며, 현재 인도네시아 한인 이주사와 한인사회에 관한 책을 집필 중에 있다.
<한인니문화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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