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재인니 한인회장상
지구는 둥그니까~ Bumi Bulat.
김 기 역 (Mugunghwa)
Kim Gi-Youck
딸아이의 방학을 맞이해 ‘한국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나와는 달리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자라난 딸 입장에서는 ‘고국 방문’의 느낌보다는 ‘한국 여행’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나의 ‘고국 방문’과 딸아이의 ‘한국 여행’간의 괴리감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이다. 11년을 인도네시아에서 살다 보니 재작년부터는 나도 고국에 돌아가면 낯선 타국에 온 이방인 느낌이 더 강했고, 함께 간 인도네시아 바이어들과의 서울투어는 내가 소개하는 입장이 아닌 오히려 내가 더 즐기고 더 놀라워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물며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자라온 녀석에게 ‘KOREA’는 나보다 더 낯설고 설레는 여행이리라.
머지 않아 딸아이에게도 ‘사춘기’가 올 것이고 인도네시아 어머니와 한국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생채기를 겪을 것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교육자이신 아버지와 전형적인 전업주부이셨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나도 ‘사춘기’시절을 그야말로 혹독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렸기에, 딸아이도 ‘자아형성’의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늘 앞선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로 자란다는 것 자체가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한국인도 아니고 인도네시아인도 아닌 아웃사이더가 되기보다는 문화적 다양성과 언어적 소통능력을 겸비한 단단하고 바른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짐을 챙기는 내내 만약을 대비해 온갖 짐을 더 챙기는 아내와 조금이라도 더 짐을 줄여 가볍게 움직이려는 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결국 딸아이가 중재에 나서 적당히 중간 정도로 챙겨야 할 짐을 구분한다. 녀석이 언제부터인지 아내와 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 딸아이여서 아내와 내가 조금씩 양보하는 것도 있겠지만, 모든걸 신속하게 빈틈 없이만 해내려고 기를 쓰는 한국적 문화와 천천히 물 흐르듯이 맞춰 나가는 인도네시아적 문화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해법과 기준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대견스럽다.
한국의 봄과 겨울은 겪어봤으니 이번엔 ‘여름’이다. 더운 적도에 산다고 불평한 적은 없었지만 아빠의 나라가 여름에 얼마나 더운지, 열대야의 밤은 또 얼마나 끈적거릴지 체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밤 8시가 넘어서야 뉘엿뉘엿 지는 노을을 보며 아빠의 나라는 하루가 참으로 길다고 칭얼대겠지? 불현듯 딸아이가 다섯 살 때 12월 크리스마스에 인천공항에 내려 청사를 벗어나는 순간 입을 ‘호호’ 거리며 입에서 ‘asap(연기)’가 난다며 신기해 하고, 두툼한 겨울점퍼에 장갑을 신기해하며 뒤뚱뒤뚱 걷던 모습, 아빠의 나라는 나라전체에서 AC(에어컨)을 켠 거냐며 묻던 일이 기억나 피시 웃음이 난다. 딸에게 그 때 일을 이야기 하니 본인은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를 떼며 같이 웃는다.
이번 여름 한국에서는 ‘한국 민속촌’ 방문과 ‘북촌 한옥 마을’에서 묵게 될 예정이고, 사실 나도 설렌다. 내가 꼭 딸아이만 했을 초등학교 4학년 시절에 난생처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가봤던 ‘민속촌’ 어릴 적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TV 드라마 ‘암행어사’, ‘전설의 고향’이 촬영되는 곳이어서 ‘자연농원’보다 더 기대했던 곳이었다. 민속촌에서 다양한 선조들의 삶의 모습과 집집 마다 특징들을 설명해주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나도 딸아이에게 한옥의 우수성과 선조들의 삶에 대해 설명해주리라. 어릴 적 내가 살았던 아궁이에 땔감을 때워 살던 초가집을 보면 딸아이는 흥미로울까, 측은하게 생각을 할까 사뭇 궁금하다. 그리고 북촌 한옥마을에서 묵을 땐 마당에 둘러 앉아 수박을 쪼개 먹고, 더위를 쫓기 위해 서로 등목을 해줘야지. 자기 전 불을 끄고‘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이야기와 ‘내 다리 내놔’ 귀신 이야기를 해주면 바깥 화장실을 갈 때 “아빠 같이 가”라고 하겠지? 아차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귀신 이야기도 빠뜨리지 말아야겠다.
일정 중 또 기대되는 하나는 내 고향 땅끝 ‘우수영’ 방문이다. 임진왜란 시절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은 해군 군영으로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던 곳이다. 좌수영은 ‘여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울돌목’이 있는 ‘우수영’은 아직도 그 이름 그대로를 사용한다. 몇 해 전 ‘명량’영화에 나왔던 이순신 장군님의 후예들이 사는 곳이고, 아빠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는 이야기에 녀석의 눈이 반짝거린다.
쨍쨍한 여름 태양 아래 고추 따기 체험과 담배 잎 따기 체험을 하게 될 것이고, 새참에 먹는 돼지 머리와 사이다가 얼마나 맛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운이 좋으면 된장을 바른 홍어를 먹고 아찔한 경험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남녘의 낮고 둥근 산 넘어 저물어가는 시뻘건 노을도 보게 될 것이고,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구 밖 우물에서 길어먹는 우물물이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알게 되리라. 자연과 함께 부대끼는 시골의 삶 속에서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그 땅에서 이루어온 것들이 바로 ‘나’이고 바로 ‘딸아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이 지구의 한 귀퉁이에서 내 자녀들에게 먹일 채소와 과일을 소중하게 키워내며 지금껏 더럽히고만 살아온 것들을 회개하듯이 나무들을 심고 가꿀 것이다. 노년의 바램에 앞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성묘’이다. 고조 할머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셔져 있는 산소에 찾아가 동그란 묘소의 잡초들을 뽑아내며 사랑이 가득했던 할머니 이야기를 해줘야지. 딸아이가 할머니 묘소 앞에서 함께 절을 올리는 모습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커다란 전율이 느껴지고 울컥한 느낌이 요동을 친다. 돌아가신 어르신들도 나와 내 딸아이를 보고 너무 반갑고 기뻐하시리라.
내 자식들한테만은 내가 키운 것들을 먹이겠노라 매일을 쉬지 않고 일하시던 할머니의 도톰한 손이 문득 떠오른다. 노동의 굳은살과 굳어진 관절 때문에 맞잡으면 마치 커다란 거인의 손을 잡은듯하여 괜히 든든했던 할머니의 손. 배탈이 나 낑낑거릴 때마다 따뜻한 물로 손을 씻으시곤 손주 녀석의 배를 가만가만 문질러주시면 통증은 금새 가라앉고 잠들게 되던 요술 손. 할머니의 요술 손은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을지 혼란스럽다.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지 5년 만에 한국에 돌아가 할머니를 찾았을 때 전북의 한 요양소였고 입구에서 한참을 기다려 들어간 곳은 십 여명의 할머니들이 함께 계신 곳이었다. 할머니에게 안기자 반가워 하시지만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할머니는 애써 의연하게 날 쓰다듬어 주셨고 그 손은 여전히 도톰하고 따뜻하셨다. 그래 할머니는 내 안의 추억인데 내 딸아이에게 말로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건 왠지 무모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나의 삶을 온전히 살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내 아이에게 추억과 느낌으로 온전히 전달되어 내 아이의 아이에게 그리고 그 아이의 아이들에게 전달되리라.
내 고향의 아침 햇살과 바닷바람이 딸아이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으면 좋겠고, 내 부족한 언어와 미력한 표현력으로 알려주기 힘든 이 여행의 의미를 태양과 바다가 느끼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자랐고 떠나온 그 곳을… 머나먼 대양을 건넌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아이가 찾아 가게 되는 이것은 마치 명절의 ‘귀향’ 그것과는 사뭇 다른 ‘설레임’이고 좀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리움’이다. 내 욕심으로 내가 자라고 겪어온 것들을 아이에게 지루하게 나열하게 되지 않기를 기도해야겠다. 딸아이가 나로 인해 ‘대한민국’을 억지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먹고, 걸으며 느낀 것들을 통해 제 스스로 깨닫는 것이 많아지기를 기도해야겠다.
내일 아침엔 아이의 자전거를 차에 싣고 ‘안쫄’ 바닷가에 가야지. 딸아이가 태어나 자란 이곳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곳이 결국은 푸르른 바다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지.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어릴 적 내가 부르던 “앞으로” 동요를 가르쳐 함께 불러야지. 지구촌 어딘들 내가 발 디딘 땅에서 푸르른 추억이 자라나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돋아나게 마련인 것을…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보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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