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45회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안 11개국 정상들이 손을 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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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방콕·자카르타=연합뉴스) 박진형 강종훈 박의래 특파원 = 과거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다양한 국제관계 스펙트럼을 드러내며 '살길'을 모색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지정학적 이념 지형'이 또 변곡점을 맞았다.
'자국 우선주의' 기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한동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자국 이익을 확보했던 동남아 국가들도 제각기 국제질서 관련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동남아는 베트남과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친중 공산권 국가와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 반공산주의 국가로 구분됐다. 동남아국가연합체인 아세안(ASEAN)이 출범한 것도 1967년 인도차이나반도에 부는 공산주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되면서 베트남 등 친중 국가로 꼽히던 국가도 아세안에 합류했고, 동남아는 대체로 중립·실리 외교를 표방하며 경제적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지역이 됐다.
오히려 반중으로 꼽히던 인도네시아는 중국 투자 덕분에 경제 성장을 이뤘고, 반미로 꼽히던 베트남은 미국 투자를 받아 중진국으로 올라서고 있다.
'신냉전'이 시작된 최근에는 서방과는 물론 중국과도 공동 군사 훈련을 하는 등 양다리 외교를 펼치며 미중 갈등의 수혜를 입기도 했다.
중국·인도네시아 정상회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오른쪽)과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가)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악수하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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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국가서 '안미경중'된 인니…관세장벽 등 갈등에 지형도 달라지나
인도네시아는 독립 직후부터 비동맹 중립 외교를 표방하며 냉전 시절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일명 '제3세계'의 대표 국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67년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섰고 32년간 철권통치를 펼치며 강력한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1998년에는 화교를 상대로 한 비극적 학살 사건이 벌어지는 등 반중 정서는 강력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과 수하르토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인도네시아는 경제적으로 중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특히 지난 10년간 인도네시아를 이끌던 조코 위도도 정부에서 경제는 중국과, 안보는 미국과 함께하는 일명 '안미경중' 모습을 보였다.
조코위 정부에서 광물 수출을 제한하고 제련소 등에 대거 투자해 부가가치를 높이겠다는 일명 '다운스트림'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기업들의 막대한 투자 덕분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지난달 취임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 정부에서도 이어질 전망이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취임 첫 해외 순방지로 중국을 택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만나 협력을 약속했다.
서방과 대규모 합동 군사 훈련을 하면서도 최근에는 러시아와 첫 합동 해군훈련을 하기도 했으며 중국, 러시아가 주도하는 신흥 경제국 연합체 브릭스(BRICS) 가입 의사를 밝히는 등 미국 등 서방에만 경도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면 미국으로부터 미중 간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트럼프 정부가 중국 연관 공급망을 추적해 관세를 물리겠다고 예고하면서 중국 투자 의존도가 높은 인도네시아 입장에서는 생각지 못한 관세 장벽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다.
지난 8월 중국·필리핀 선박 충돌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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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동남아 친미 반중 최전선…中과 남중국해 갈등은 인니·베트남과 '동병상련'
필리핀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동남아 국가 중 중국과 가장 격심하게 대립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이 지역 중국 상대 포위망의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필리핀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2016∼2022년 재임) 당시 친중 노선을 걸었으나, 202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 미국과 급속히 밀착하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4월 미국·일본과 첫 3국 정상회의를 갖고 3국 합동 방위체제 구축을 공식화했으며, 미국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항할 군사력 증강을 추진 중이다.
중국은 남중국해 분쟁 해역에서 물대포 발사, 배로 들이받기 등 방식으로 필리핀을 공격하면서 역설적으로 필리핀의 이런 행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역시 겪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2019년과 2020년 중국 함선이 인도네시아 배타적경제수역(EEZ)인 북나투나해에 들어오자 전투기를 띄워가며 강경 대응을 펼치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지난달 프라보워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취임하자 북나투나해로 중국이 여러 차례 함정을 보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그러다 지난 9일 양국 정상이 만나 이 지역에서 어업과 석유·가스 공동 개발에 합의하면서 갈등이 봉합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지만 언제든 다시 갈등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베트남 역시 남중국해를 놓고 중국과 언제든지 부딪힐 수 있는 관계여서 안보 면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2016년 5월 2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베트남 하노이 중심가 서민식당 '분짜 흐엉 리엔'에서 베트남 전통음식 '분짜'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오다 몰려온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하노이 AP 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 태국·베트남, '대나무 외교'로 실리 추구
태국과 베트남은 일명 '대나무 외교'로 불리는 중립 실리 외교를 펼치고 있다.
베트남은 과거 대표적인 반미 국가였지만 1995년 수교 이후 미국의 대규모 투자를 받으며 관계를 회복했고, 지난해 9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 관계를 최고 수준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격상했다.
또 국가 서열 1위인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지난 8월 취임 이후 가장 먼저 중국으로 날아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양국 관계 강화를 약속하는 등 중국과도 양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초강력 보호무역주의를 예고하면서 대미 무역흑자가 세계 4위에 이르는 베트남도 긴장하는 분위기다.
태국은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는 등 동남아의 미국 '반공 군사 체계' 핵심 역할을 하며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미국 우방으로 꼽히지만, 중국과도 '가족 같은 관계'라며 유대를 강화해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미국이 반대 입장을 표하면서 관계가 경색된 시기도 있었다.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짠오차 정권에 미국은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며 군사적 지원을 중단했다.
이후 태국은 중국에 밀착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미국과 전통적 협력 관계도 이어왔다.
여전히 태국은 미국과 중국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두 나라와 합동 훈련도 각각 실시한다.
경제적으로도 태국은 미국·중국과 긴밀히 연결돼있다.
태국은 브릭스와 서방 선진국들이 참여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동시에 추진 중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화교 인구 비중이 높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중립 외교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2018년 6월 11일 북미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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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 친중 유지
미얀마와 캄보디아, 라오스는 친중으로 구분된다.
미얀마는 국경을 접한 중국과 관계를 중시해왔으며, 미국은 미얀마에 대한 압박을 이어왔다.
특히 중국은 인도양 연결망 확보라는 지정학적 가치 등으로 미얀마와 전면적인 협력 관계를 맺었고, 2021년 쿠데타 이후에도 군사정권에 무기 등을 지원하며 '뒷배' 역할을 해왔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국 일대일로(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사업에 깊숙이 참여, 중국 자본의 대규모 투자를 받으면서 동남아에서 가장 친중적인 국가가 됐다.
이에 따라 트럼프 2기에서도 중국의 동맹국 역할에 충실할 것으로 예상된다.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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